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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연합봉사 동아리 우하이Uhai 코트디부아르에 가다

작성일 : 2012-09-28





안녕이라고 인사하는 아이들이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대학생 의료봉사 동아리 우하이(Uhai, 스와힐리어로 생명이라는 뜻)에서 활동하고 있는 나는 올 여름 회원들과 함께 코트디부아르에 다녀왔다. 아직은 아무런 기술도 없는 평범하고 유약한 대학생이지만 작은 도움이 되고 싶어 참여한 아프리카 의료봉사였다. 의료진들 옆에서 도우미 역할을 할 뿐이었지만 환자들이 고통 속에서 사는 모습을 보며 나의 살아온 길과 살아갈 길을 동시에 성찰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726일부터 89일까지 2주간 굿뉴스의료봉사회와 함께한 아프리카 의료봉사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더 빨리 뛰고 또 뛰었다

726일 인천공항을 출발해 두바이를 거쳐 약 20시간의 긴 비행을 마치고 코트디부아르 수도 아비장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6시에 기상해 간단히 아침을 먹고 의료봉사 장소에 갔더니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의료팀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대학생봉사단이 할 일은 접수부터 진료, 처방 등의 과정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게 안내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고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쉽지 않았다. 불어, 영어, 한국어가 3중으로 통역되어야 하는데, 영어가 가능한 코트디부아르 현지인 봉사자의 수가 부족해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많았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진료실 안의 환자 좌석이 비어 있는 것을 볼 때면 애가 탔다. 만만치 않은 비용을 들여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런 도움이 못된다고 생각하니, 나의 무능력함 앞에 허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자 점점 전체적인 흐름이 원활해지며 첫날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왔고, 점점 빠른 진료가 가능해졌다. 환자들을 의사들과 빨리 만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더 빨리 뛰고 또 뛰었다.

여기서는 치료가 안돼요

아비장에서 의료봉사는 내과, 치과, 한방과, 안과 등을 진료했는데, 하루 평균 천여 명의 환자들이 왔다. 가장 많은 환자가 몰린 곳은 다름 아닌 안과였다. 특히 눈동자가 누런 사람이 많았다. 백내장과 녹내장에 걸린 사람도 많이 왔는데, 의료봉사단의 시설로는 치료가 어려워서 그냥 돌려보내야 하는 환자들이 많았다.

하루는 동공이 허옇게 된 아기를 안고 한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나는 너무 놀라서 대기자들을 뒤로하고 그 분을 먼저 접수처로 보냈다. 다른 환자들도 아기가 안쓰러운지 이해해 주셨다. 안과 간호사 선생님이 아기를 보더니

이것은 녹내장인데, 이곳에서 치료가 안돼요.” 하며 매우 안쓰러워하셨다. 결국 그날 아기와 아주머니는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도 눈의 질병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이 왔다. 안과에 너무 많은 환자가 왔고, 더 이상의 치료가 안돼서 나는 한마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눈을 가리키며 피니(끝났어요)”라고 말이다.

눈에 고통이 서려 있는데 아프지 않다는 아이

아비장에서 첫 주를 보내고, 2주차는 아비장에서 8시간 떨어진 부아케로 장소를 옮겼다. 부아케는 문명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축구가 인기 있어서인지 그곳 오지에도 축구 골대가 있었다. 숲 속을 지나 도착한 학교 교실에 치료실을 만들었다. 그곳에서는 코트디부아르에서 발병률이 높다는 풍토병인 부룰리 궤양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목표였다. 접수된 30명만 치료할 예정이었으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왔다. 우리는 상처를 소독하는 드레싱을 도왔다.

내가 치료실에서 처음 본 부룰리 궤양* 환자는 남자아이였다. 언제 어디서 감았는지 모를 붕대는 이미 까매지고 너덜너덜 풀려 있었다. 그것을 식염수로 불리며 하나하나 풀었는데 썩은 냄새가 확 났다. 생애 처음 맡아본 심각한 냄새였다. 그리고 이상한 큰 나뭇잎이 붙어 있었다. 오래되어 살과 함께 썩어 있었고 여기저기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엄마가 붙여줬다는 나뭇잎은 현지의 민간요법이었던 것이다. 원장님께 진료를 받고 소독을 시작했다. 빨간 베타딘을 멸균된 솜으로 적셔서 상처부위를 톡톡 쳤다.

싸바(괜찮니)?” “싸바(괜찮아요).” 아이는 10

정도 되어 보였는데, 아프다는 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가끔 눈을 찔끔하기도 했지만 곧 괜찮다며 웃음을 지었다. 눈에는 고통이 서려 있는데 아프지 않다고 하는 걸 보니 더욱 안쓰러웠다. 아직 어린 아이인데 고통에 너무 일찍 익숙해진 것 같아 그것이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고통과 평생을 같이하는 그들

두 번째로 본 부룰리 환자는 가운데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붕대를 풀고 드레싱을 하려고 보니 손가락이 이상했다. 크고 하얀 무언가가 있었다. 처음에는 고름인 줄 알고 닦아내려고 했는데 닦아지지 않았다. 간호사 선생님께 물어보니 뼈라고 했다. 직접 뼈를 보는 것이 처음이라 너무 놀랐다. 간호사 선생님은 무척 안쓰러워하시며 이 상태에서 다른 조치 방법이 없다며 소독하고 붕대를 잘 감아주라고 하셨다. 마음 한편이 시려왔다.

만약 이 아저씨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그 분도 소독을 하고 붕대를 감는 동안 모든 아픔을 잘 참고 메르씨(고마워요).” 하고 돌아갔다.

나는 한국에서 편안함에 익숙했는데 그곳은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라서 충격이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마음 안으로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아파도 옆에서 간호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싸우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갑갑했다. 생명이라는 고귀한 이름으로 태어나 고통과 평생을 같이하는

그들이었다.

불편함은 적응하면 된다

1주차 때 의료봉사 장소에는 수백 명이 쓰는 화장실이 하나 있었는데, 남녀공용에 물은 수동으로 받아서 내려야 하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낯설어서 변기에 엉덩이를 댈 수도 없었다. 되도록 화장실에 가지 않으려고 물도 안 먹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서 적응되었고, 화장실 냄새도 익숙해졌다. 샤워는 호텔에서 했는데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큰 것을 바랐구나 싶지만, 그 당시에 나에게는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샤워했던 나인데 급하다보니 찬물에 적응했다.

2주차 때는 현지인이 빌려주신 집에서 지냈는데, 친한 동생과 샤워를 하다가 갑자기 물이 한두 줄기만 나오는 것이 아닌가! “?” “언니. 물이 안 나와.” 말로만 듣던 샤워 중 단수였다. 동생은 몸을 씻고 나는 머리에 샴푸를 묻히고 있었다. 끝내 물은 시원하게 나오지 않았지만, 한두 줄기 나오는 물로 씻고 샤워를 마쳤다. 한국에 돌아와 따뜻하고 센 수압으로 샤워를 하니 정말 행복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코트디부아르에서의 불편을 생각하며 말랑하게 풀린 내 마음을 다시금 생각해보기도 한다.

안녕할 수 없는 아이들과의 헤어짐

대학생 봉사단은 코트디부아르에서 의료봉사만 아니라 현지인들과 같이 할 수 있는 태권도, 한국어, 그림 그리기, 팔씨름 등의 프로그램도 준비했다. 나는 한국어를 가르쳤다.

큰 나무 아래 아이들을 모아놓고 노란 저고리에 빨간 치마의 한복을 보여줬다. 아이들이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내가 먼저 입어보고 한 소녀에게 입어보게 했다. 소녀는 수줍어하면서도 좋아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 그녀에게

한복을 선물했다. 그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선물은 아니었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우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고 싶었다. 그 다음에는 안녕고마워라는 글자를 보여주고 쓰고 말하도록 했다. 잘 따라하는 아이들에게는 펜을 선물로 줬다. 정말 잘 쓴 아이들도 많았고, 배움에 열의를 보인 아이들도 많았다. 수업이 끝난 후 연습한 종이가 아까워 종이비행기를 접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선물로 준 물건들보다 종이비행기를 더 좋아했다.

어느덧 봉사를 마치고 떠날 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버스를 탔다. 그런데 아이들이 뛰어오며 안녕!”이라고 외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가르쳐준 단어일 뿐이지만 아이들이 뛰어오며 인사하는 소리에 내 마음이 뭉클했다. 헤어짐이 슬펐다기보다, 나야 한국으로 가면 안녕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곳의 아이들은 우리가 치료한 환자들처럼 곧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부룰리 궤양은 전염성이 있다고 하니 더더욱 그랬다. 우리가 있던

2주일로는 끊을 수 없었던 악순환의 고리를 생각하니 슬퍼졌다. ‘안녕이란 단어를 괜히 가르쳐줬나 싶을 정도로 아이들이 외치는 그 단어에 가슴이 무척 저렸다.

내 분야에서 프로가 되어 그들을 만나고 싶다

나는 꿈에 대해서 매우 고민이 많았다. 생명과학을 전공하고 있어 과 특성상 진로의 방향이 아주 다양하다. 의사, 약사, 기업가, 연구원, 교사 등 너무 넓어서 고민하는 친구들도 많고, 나 또한 그랬다. 이번 아프리카 의료봉사에 동참해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교육자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코트디부아르는 질병의 예방과 교육이 뒤떨어져 있고, 위생에 대한 개념 또한 거의 없다. 까매진 붕대를 풀고 버리려고 하자 빨아서 다시 쓰겠다고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아이가 볼이 매우 부어서 왔길래 다친 줄 알았는데 이가 썩어서 그런 것이었다.

앞으로도 나는 처음 아비장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것처럼 무능력한 나를 잊지 않으려 한다. 중요한 것은 나는 내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야 하고 지금은 그것을 준비할 단계라는 것이다. 훗날 예방의학과 교육 분야에 프로가 되어 이번에 느낀 바를 행하고 싶다. 그리고 또한 매년 그곳에 가서 봉사를 하고 마음을 교류하고 싶다.

꿈을 향해 함께 갈 수 있는 동아리를 위해

올해 2, 봉사 동아리 우하이를 만들어 동아리를 이끌게 되었고 올 여름 처음으로 의료봉사를 위해 코트디부아르에 갔다. 우하이를 만들기 전만 해도 아프리카 의료봉사는 꿈일 뿐이었다. 하지만 꿈을 생각하고 찾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정말 말로 설명하기 벅찬 좋은 경험을 해서 행복했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러한 경험을 우하이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더 좋았다. 또한 친구들의 속을 더 깊게 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앞으로도 더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하이가 꿈을 향해 함께 갈 수 있는 뜻이 비슷한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 진지하고 목표가 있는 동아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겉으로는 천방지축 장난스러운 우리지만 함께 모여 진지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모임이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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